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랴쿠 덴노 (문단 편집) == 행적 == 《[[일본서기]]》 및 《[[고사기]]》에 의하면, [[안코 덴노]]가 재위 3년 만에 '''마요와 왕'''(眉輪王)에 의해 [[살해]]되는 사건이 일어났다[* 《고사기》에는 당시 7세였다고 하나 이것은 오기인 듯하다.]. [[태자]] 시절의 이름은 대박뢰황자(大泊瀨皇子)였다. 안코 덴노는 제16대 [[닌토쿠 덴노]]의 아들로 자신의 숙부였던 '''오쿠사카 황자'''(大草香皇子)에게 [[황자]]의 [[누이]]동생인 구사카노하타비히메 [[황녀]](草香幡梭姫皇女)를 안코 덴노의 친동생이었던 오하쓰세 황자(즉 유랴쿠 덴노)의 비(妃)로 삼을 것을 명령했다.[* 오쿠사카 황자와 구사카노하타비히메 황녀는 오하쓰세 황자에게는 숙부와 [[고모]]뻘이 되었다.] 중개역을 맡았던 네네노 오미(根臣)가[* 《일본서기》에 [[사카모토|사카모토노]] 아손(坂本臣)이라는 집안의 시조로 기록된 인물이다.]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황자가 보낸 '오시키노 다마카쓰라'(押木玉鬘)[* 고대 일본의 장신구로 많은 구슬을 꿰어서 머리에 걸도록 만든 것이다. '금동관'이라고도 한다.]를 탐내어 일부러 안코 덴노에게는 '오쿠사카 황자가 거절했다'라며 거짓으로 말을 꾸며 전했다. 이에 격노한 안코 덴노는 오쿠사카 황자를 죽이고 그의 [[아내]]였던 [[네토라레|나카시노히메노미코토(中蒂姫命)를 자신의 황후로 삼아버렸다.]] 마요와 왕은 나카시노히메가 오쿠사카 황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, 이 사건은 마요와 왕이 부친의 원수인 안코 덴노를 암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. 형 안코 덴노의 암살을 알게 된 오하쓰세 와카타케루는 자신의 형제들을 의심하여 야쓰리노시로히코 황자(八釣白彦皇子)를 죽이고, 이어서 사카이노쿠로히코 황자(坂合黒彦皇子)와 마요와 왕을 죽이려고 했다. 두 사람이 [[대신|오오미]](大臣)였던 카츠라기노 쓰부라(葛城円)의 저택으로 도망쳐 숨자 오하쓰세는 저택에 불을 질러 이들 두 사람은 물론 카츠라기노 쓰부라도 태워 죽였다. [[사촌]] 형제였던 이치노헤노오시하 황자(市辺押磐皇子)·미와노 황자(御馬皇子) 형제도 살해하여 자신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, 그 해 11월 [[일본국왕|오오키미]](대왕)가 되었다. 즉위한 뒤 유랴쿠 덴노는 구사카노하타비히메 황녀에게 [[구혼]]하러 가는 도중에, 시키노 아가타누시(志貴県主)의 저택이었던 '가쓰오키'(鰹木)에 올라가 베를 두른 흰 개를 손에 들었다. 이것을 혼인선물로 하여 구사카노하타비히메를 [[황후]]로 맞았다. 즉위 후에도 사람을 [[처형]]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나중에 '''대악천황'''(大惡天皇)이라는 혹평을 받았다고 하나, '대악천황'이란 기술은 [[부레츠 덴노]] 조에도 보이므로,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. 헤구리노 마토리(平群真鳥)를 오오미(大臣, 대신), 오오토모노 무로야(大伴室屋)와 모노노베노 메(物部目)를 오무라지(大連, 대련)로 삼고, 군사력으로 전제왕권을 확립한 오오하쓰세노와카타케루노 오오키미(유랴쿠 덴노)는 연합적으로 이어져 있었던 주변 지역의 소왕국들을 자신의 [[야마토]] 대왕권하에 복속시키려고 했다. 특히 당시 최대의 지역 정권이었던 기비(吉備)씨를 [[반란]] 진압이란 명목으로 토벌했다. '''[[키비|기비]]씨의 난'''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, 기비노 시모쓰미치노오미 사키쓰야(일본어: 吉備下道臣前津屋)나 기비노 가미쓰미치노오미 다사(일본어: 吉備上道臣田狭)의 '반란'을 군사적으로 토벌하고, 기비씨 정권의 약체화를 추진하여, 오오키미 사후에는 기비 씨족을 [[외척|외가]]로 둔 '''[[왕자의 난|호시카와 황자(星川皇子)의 난]]'''을 오토모노 무로야 등이 진압함으로써 야마토 대왕권의 우위를 결정짓게 한 것이다. 《일본서기》에는 따로, 469년 [[하리마(일본)|하리마]](播磨)의 아야시노 오마로(文石小麻呂), 474년 [[이세]](伊勢)의 아사케노 이라쓰코(朝日郎)를 군사적으로 토벌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. 이 밖에도 [[야마토]](왜)에서 '[[오나라|오국]]'(吳國)이라 불리던 [[남북조 시대]] [[중국]]의 [[남조]] [[유송]](宋)으로부터 수공업자인 아야하토리(漢織), 구레하토리(吳織) 등을 초빙했으며, 흩어져 있었던 [[하타]] 씨(秦氏, 진씨, 신라계 도래인으로 추정) 백성에 대한 통솔을 강화하고 양잠업을 장려했다고 한다. 재위 22년 1월 1일(478년 2월 18일), 아들인 시라카 황자(白髪皇子, 훗날의 [[세이네이 덴노]])를 황태자로 삼고, 이듬해인 8월에 병으로 붕어했는데, 오오키미의 사망은 오오키미 재위 23년째 일로서 서력으로 환산하면 479년의 일이지만, 중국의 기록인 《[[양서(역사책)|양서]]》(梁書)의 [[소량|양(梁)]] [[양무제|무제(武帝)]] [[천감]](天監) 원년(502년)에 '무'(武)라는 이름의 왜왕을 정동장군(征東將軍)으로 진호(進號)한 기록이 있다. 이 왜왕 무를 오하쓰세 오오키미, 즉 유랴쿠 덴노로 비정하는 견지에서, 실제 오오키미의 사망 시기가 《일본서기》나 《고사기》에 적힌 것보다 나중의 일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애초에 왜왕 무를 유랴쿠 덴노로 비정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.[* 그러나 479년과 502년 책봉은 신왕조 개창 기념으로 남제나 양나라가 각각 일방적으로 진호를 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. 단순히 저 두 기록만으로는 479년 이후로도 왜왕 무가 집권 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.] 왜왕 무를 유랴쿠 덴노로 보는 견해는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에서 유랴쿠 덴노를 가리키는 말로 생각되는 '와카타케루'(獲加多支鹵大王, 幼'''武'''尊)에서 '武'(무)만을 따온 것으로 여긴다. 왜왕 무를 유랴쿠 덴노로 볼 수 없다는 견해는, 유랴쿠 덴노의 재위 기간은 456년에서 479년인데 무(武)가 478년 유송에 보낸 상표문(上表文)에서 당시 자신이 아버지의 상중임을 밝히고 있어 456년에 즉위한 유랴쿠 덴노와는 일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. 즉, 유랴쿠 덴노의 아버지인 [[인교 덴노]]는 453년에 사망했으나 왜왕 무(武)의 아버지는 478년에 사망했으므로 유랴쿠 덴노와 무(武)는 동일 인물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. 이에 의하면 유랴쿠 덴노의 이전 4명의 천황 역시 각각 《[[송서]]》(宋書)에 나오는 찬(讚), 진(珍), 제(濟), 흥(興)과 동일 인물일 수가 없다. 유랴쿠 덴노 이후 천황은 한동안 고고학적, 역사적으로 존재감이 ~~[[버로우]]~~ 사라졌다가 오호도 왕(제26대 [[케이타이 덴노]]) 이후부터 역사에 비중을 다시 드러내게 된다. 케이타이 덴노의 출신과 당시 정세를 통해 3세기에 형성된 초기 [[야마토]](왜) 대왕권은 5세기 경 와카타케루 대왕(유랴쿠 덴노) 사후 붕괴되었고, 6세기에 오호도 왕을 기점으로 재편성이 이루어졌을 거라는 <왕조 교체설> 추측이 많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